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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육체, 둘 중 어느 쪽이 생명의 본질에 가까운가?

영혼과 육체, 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이 생명의 본질인지를 알면 답이 간단해질 것이다.

영혼과 육체: 탄생 그리고 죽음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그 육체의 코에 생기 곧 영혼을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한다(창세기 2:7). 모든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결합은 생명의 수한이 다했을 때 비로소 풀리게 된다.

전도서 12장 7절, 영혼과 육체

육체를 구성하던 흙은 인간의 기식이 마치면 땅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처럼 육체가 소멸되어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 사이의 분리’를 뜻할 뿐 결코 영혼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혹자들은 창세기의 기록을 잘못 해석하여, 육체를 만드신 후 영혼이 그 안에 들어갔으니 육체가 생명의 근원이며 영혼은 육체의 창조 후 만들어진 일종의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비유를 들어 그들의 논리를 설명하자면, “사용하던 핸드폰의 수명이 다해서 버리면, 그 핸드폰을 가동하게 하던 ‘전기’는 자연히 방전되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성경의 다양한 기록을 살펴보면 영혼과 육체는 분명히 별개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증거

실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영혼과 육체 죽음이 별도로 존재하며 육체가 죽을 때 영혼도 함께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교훈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만약 육체가 죽었을 때 영혼도 따라서 소멸하는 것이라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한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 영혼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버젓이 살아있으며, 영혼과 육체의 죽음은 별개인 것이다.

선지자의 증거

이와 같은 사실은 구약시대 선지자의 기록을 통해서도 증명할 수 있다.

욥기 19장 26절, 영혼과 육체

욥이 하나님을 보리다고 이야기한 시점은 언제인가?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바로 뒤의 표현인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육체 밖에서 욥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을 보겠는가? 그리고 그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어떤 이들의 잘못된 주장처럼, 육체의 죽음 후 영혼이 소멸한다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이 구절은 옳지 않다.

또한 히브리서의 기자도 같은 논조의 증거를 기록해두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브리서 12:9)

‘아버지’라는 표현에 주목해봐야 하는데, 우리는 왜 육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가?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으나 오늘의 주제와 가장 적절한 답변을 택하자면 “나의 몸을 지어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도, 우리의 영혼을 지어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통해,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신지 분명히 증거했다(이사야 64:8).

영혼과 육체, 아버지, 육체의 아버지, 영혼의 아버지
아버지가 아버지이신 이유는, 자녀들의 육체를 지어주셨기 때문.

그런데 다시 본래의 논지로 돌아가보자면, 만약 영혼이 육체를 움직이는 에너지에 불과하다면 왜 ‘에너지의 아버지’까지 존재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영혼은 에너지고 육체가 생명의 근원이라면, 굳이 영혼과 육체 각각의 아버지를 구분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영혼과 육체 모두 지으신 아버지다’라고 표현하는 게 나았을 터다. 성경에 위와 같이 기록된 이유는, 영혼과 육체 각각의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표현함으로써 영혼이 육체의 에너지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격체임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영혼과 육체 중, 어느 것이 생명의 본질인가?

지금까지 영혼과 육체 두 존재는 분명 별개이며 두 존재의 죽음 또한 별개임을 살펴봤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확실하게 개념을 정립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영혼과 육체 중, 과연 어느 쪽이 생명의 근원일까? 열왕기상 17장의 기록을 통해 그 답을 알 수 있다.

엘리야가 잠시 머물던 집의 아들이 죽었는데, 엘리야는 당시 하나님께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영혼을 다시 몸에 넣어주셨고, 아이는 살아났다(열왕기상 17:17~22). 오늘의 주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영혼이 몸을 떠나자 육체는 움직임을 멈췄고, 영혼이 다시 돌아오니 그제야 육체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영혼은 육체의 상태에 관계없이 언제나 생명을 지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혼과 육체 중, 어느 쪽을 생명의 근원이라 불러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영혼이 입는 두 가지의 옷이 있다고 증거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

육의 몸. 그리고 신령한 몸. 이 몸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옷일 뿐이다(고린도전서 15:49). 중요한 건 그 옷을 입는 주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옷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지다 해도 사람이 그 옷을 입지 않으면 옷이 움직일 수 있는가? 영혼과 육체 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다. 앞서 엘리야의 사례처럼, 육체는 영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생명의 본질은 영혼이다.

영혼을 위한 삶과 육체를 위한 삶

한 번 더 개념을 정리하자면, 영혼과 육체는 별개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영혼은 생명의 본질이며 육체는 그 생명의 본질이 입고 활동할 옷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누구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을 위한 삶과 육체를 위한 삶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사람을 위한 삶과 옷을 위한 삶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영혼을 위해 살면

영혼을 위해 살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구원이란 여태껏 입고 있던 ‘육체’라는 옷이 ‘천사의 옷’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 영혼을 위한 삶을 살다 죽게 되면 낙원에서 위로를 받고, 마지막 나팔이 천지에 진동하는 그때에 자신의 변화된 육체(천사의 옷)를 만나게 될 것이다(고린도전서 15:51~53, 데살로니가전서 4:14~17 비교).

‘드레스코드’라는 표현처럼, 어떤 장소나 분위기마다 그에 걸맞는 옷을 필요로 한다. 우리 영혼은 도피성 지구에서의 삶을 위해 일종의 죄수복인 육체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구에서의 삶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삶을 위해서는 육체와 다른 옷이 필요하다. 그 옷이 바로 ‘천사의 옷’이며, 천국에 들어갈 이들은 자신이 여태껏 입고 있었던 죄수복(육체)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천사의 옷으로 변형되는 기적을 목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옷을 입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함께 영원히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이다.

천국, 영혼과 육체
천국은 천사의 옷을 입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공간, 천국.

육체를 위해 살면

반대로 육체의 삶만을 위해 산 인생들은 어떻게 될까? 옷을 위해 모든 자산을 투자하다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은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2~15)

보좌 앞의 영혼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다. 형벌을 당하기로 확정된 자들은 영혼의 의복조차 제공받지 못한다. 그들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육체의 삶이 마친 이후에는 아무리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도 이미 늦은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영혼과 육체 대한 성경의 여러 증거들을 살펴봤다. 육체의 삶은 영혼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며, 육체는 생명의 근원인 영혼이 입을 옷에 불과하다. 놀이공원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해본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인형탈을 쓰고 있으면 그것을 뒤집어쓴 사람이 누구든 아이들이 참 좋아해준다. 하지만 그 기쁨에 취해서, 업무시간이 마치고도 인형탈을 쓴 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육체의 안락을 위한 삶은 인형탈을 쓴 채 살아가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이 어렵지 않기를 바란다.